플레이스
‘트래픽’ LP BAR에서 떠나는 시간여행
조수경
20.10.28
흔히 인생을 영화에 비유한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듯 삶을 적나라하게 담아낸 영화도,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작가주의 작품도, 현실과는 거리가 꽤 먼 SF도, 결국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생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모든 영화가 삶에서 왔듯이 평범한 사람의 삶도 그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한 편의 영화나 다름없다.
영화에 OST가 흐르는 것처럼 우리의 삶 곳곳에도 ‘나만의 OST’가 흐른다. 사랑의 순간을 더욱 빛나게 해준 노래, 이별의 순간에 흐르던 노래, 이별 후에 그 사람의 빈자리를 채워주던 노래, 포기하고 싶던 순간에 나를 붙잡아준 노래들. 또, 누군가를 마음에 품게 되면 그 사람에게 좋은 노래를 들려주고 싶고, 그 사람의 플레이리스트가 궁금해진다.
이제 함께 노래를 들었던 사람은 희미해졌어도, 여전히 노래에는 그날의 감정이라든가 공기의 냄새 같은 것들이 묻어 있어 그 노래를 듣는 순간, 그날의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마법이 일어난다. 노래는 그냥 노래가 아니다. 노래는 장소이고, 추억이고, 약속이고, 사람이다.
몇 해 전부터 ‘복고’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뉴트로’ 혹은 ‘레트로토피아’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문화 전반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데, 특히 음악이 그렇다. 디지털 세대는 ‘온라인 탑골공원’이라 칭하며 8,90년대 가요를 즐겨 듣고, 8,90년대 가요를 들으며 자란 세대는 7,80년대 팝송에 감동한다. 젊은이들이 중고 LP를 수집하고, BTS를 비롯한 몇몇 가수들은 LP로도 음반을 발매한다.
디지털 음원이 나오면 세계 어디서든 스마트폰으로 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세상이지만, 사실 LP를 사랑한 마니아들은 꾸준히 있었다. 음악다방 시절을 지나온 세대도, 옛 시대의 낭만을 동경하는 젊은이들도, LP바를 찾아 테이블에 놓인 메모지에 신청곡을 적어 넣는다. DJ가 지름 30cm의 까맣고 동그란 판을 턴테이블에 올리면 빙글빙글 돌아가는 LP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우리는 노래가 세상에 나온 바로 그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압구정 로데오거리에 자리잡은 트래픽 LP 바의 오영길 대표는 학창시절,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던 평범한 아이였다. 소풍날, 유행가를 틀어놓고 울리불리 춤을 추던 소년이 본격적으로 음악에 눈을 뜬 것은 십 대에서 이십 대로 건너가던 무렵이었다. 홍익공전 입학 시험을 보던 날, 일찌감치 홍대 근처에 도착한 그는 커피를 마시러 카타리나 음악다방에 들렀고, 그곳에서 가수도, 제목도 알 수 없는 노래 한 곡에 매료되었다.
요즘이야 스마트폰에서 음악 검색을 하면 바로 곡명을 알 수 있지만, 당시 오 대표가 할 수 있는 건 머리와 가슴에 멜로디를 담아두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 오 대표는 운명처럼 그 노래와 다시 만났다. 그를 진정한 음악의 세계로 이끈 곡은 바로 ‘The Doors’의 <Hello, I love you>였다.
트래픽 LP BAR의 오영길 대표
이후 오영길 대표는 돈이 생기면 청계천 등지를 돌며 해적판 LP를 사들였다. 입학한 뒤에도 강의실보다 음악다방에 머물 때가 많았다. 심지어 군대 말년휴가를 나온 날에도 음악다방 오디션을 봤고, 제대 이틀 후부터 가발을 쓰고 DJ로 일할 만큼 음악을 사랑했다.
80년대 초반, 오 대표는 경희대 앞에 음악다방을 열었다. 종로에서 음악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번번이 실패였다. 이후 직장생활도 하고 공인중개사 자격증, 노무사 자격증까지 취득했지만, 마음은 늘 음악에 머물렀다. 노무사 사무실을 열고 금전적인 여유가 생기자 이번에는 오리지널 LP를 사러다녔다. LP가 빽빽하게 꽂힌 선반에서 좋은 음반을 발견할 때마다 보물찾기에 성공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2002년, 그는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 나 오래 사는 거 보고 싶어?”
질문의 의도를 알아챈 아내는 집을 팔아서 가게를 열자고 할 만큼 오 대표를 지지했다. 다행히 오 대표에겐 꿈을 위해 모아둔 돈이 있었고, 그는 아내의 응원에 힘입어 2002년 트래픽 LP BAR를 오픈했다.
처음에 오 대표는 가게 이름을 The Doors로 생각해두었으나
이미 같은 이름의 업체가 있었다.
트래픽은 영국의 록그룹 ‘Traffic’의 이름을 따왔다.
Traffic의 <Evening blue> 역시 오 대표가 아끼는 곡이다.
트래픽 LP BAR를 찾는 사람들은 주로 오래된 단골들이다. 80년대 초반 경희대 앞에서 음악다방을 할 때 인연을 맺게 된 의대생들이 이제는 나이 지긋한 의사가 되어 가게를 찾는다. 좋은 노래가 주는 감동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음악으로 맺은 오랜 인연들이 꾸준히 이곳을 방문한다.
배우 정우성, 전도연, 원빈, 가수 비 등 톱스타들이 찾는 건 물론, 영화 일을 하는 사람들, 유명한 사진가, 작가 등 각종 문화예술계 사람들이 아끼는 장소이기도 하다. 트래픽 LP BAR는 LP바 특유의 아날로그적인 감성과 모던한 인테리어가 어우러져 여럿이 함께 온 손님도, 오직 음악을 듣기 위해 혼자 찾은 손님도, 누구라도 편안하게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매달 트래픽만의 작은 음악회가 열렸고, 해마다 손수 제작한 CD를 손님들에게 나눠주는 이벤트도 있었는데, 올해는 경기가 좋지 않아 쉬어 갈 생각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1만 5천여 장의 LP와 그에 못지않은 CD가 있고, 오랜 단골손님들이 있어 오영길 대표는 행복하다.
잠시 가게 일을 도와준 아들이 오 대표가 이십 대 시절에 들었던 음악을 똑같이 좋아하고, 선곡에 재능을 보였다는 것도 즐거운 기억이다.
트래픽 LP BAR에서 매년 발행한 기념 앨범
트래픽을 운영하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오 대표에게 안면인식장애가 있다는 것이다. 유명인이 가게를 찾아도 오 대표 혼자 알아보지 못하고, 얼마 전에 방문했던 손님이 다시 찾아와도 기억하지 못해 손님들이 서운해할 때가 종종 있다고.
트래픽 LP BAR 오영길 대표에게 물었다. LP만의 매력이 무엇이냐고. 1만 5천여 장의 LP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반은 어떤 거냐고. 그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얼굴을 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40년이 넘는 세월을 LP에 푹 빠져 지냈지만 아직도 그 매력이 뭔지 잘 모르겠다고. 이렇게 좋은 노래들 속에서 최고를 고르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고. 대답을 듣고 ‘사랑이구나’ 싶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이유가 없는 것처럼, 좋은 친구들 중에 최고를 꼽기 어려운 것처럼, 오 대표에겐 음악이 그랬다. 그가 꼽는 희귀음반 역시 값이 많이 나가는 LP가 아닌,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전율이 느껴지는 곡이 담긴 음반이라며 ‘Betty Kaplowitz’가 부른 <Superstition>을 들려준다.
김은아의 단편소설 <당신의 자장가>에는 ‘노래를 많이 아는 사람이 부자라고 생각하는 부족’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부자로 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거나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것. 첫 번째는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지만, 두 번째라면 가능하다. 트래픽 LP BAR 오영길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
좋은 음악을 많이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음악을 듣고 감동하는 일입니다
❞
조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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