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는 다른 곳에서 모방할 수 없는 독특한 자원들이 있다. 특히 오랜 기간 장인으로 살아온 분들과 그들이 활동하는 지역 사이에는 그간의 역사가 축적돼 있다. 그리고 장인들이 만드는 제품에는 그들이 일과 삶을 대하는 방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만 한국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대량 생산과 효율성 중심의 산업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모든 자원이 수도권으로 집중됐다. 그 결과, 지역의 장인들의 삶과 그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은 평가절하되기에 이르렀다. 장인들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로 여겨졌고, 그들 자신도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고수했다.

다행히 경제 선진국 반열에 오른 시점부터 변화의 물결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경쟁, 효율, 신분을 추구하던 물질주의 사회에서 심미성, 차별성,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탈물질주의 사회로 시대의 축이 옮겨지고 있다. 모방할 수 없는 지역문화의 가치가 발현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 가치를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장인'이다. 장인과 함께 로컬 콘텐츠를 재생산하고 브랜딩하는 로컬 크리에이터의 역할 역시 중요해졌다.

그동안 한가지 일을 오랫동안 해온 장인들과 새로운 시대의 주체인 로컬 크리에이터들은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우연히 만나더라도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서 공감과 소통을 이루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의 '로컬브랜딩스쿨'은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됐다. 처음 시작한 2019년에는 제주에서 오랫동안 묵묵히 일을 해 오신 목공예 현병묵 장인, 가구디자이너 양웅걸 작가, 녹차 김맹찬 농부, 해녀복제작 정부미자 장인과 함께 했다. 센터 담당자와 스쿨 마스터가 장인들을 찾아가서 대화를 나눈 것이 시작이었고, 다양한 분야의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한 달 동안 장인들을 만나고 탐구하여 브랜딩을 하고 발표를 했다.

로컬브랜딩스쿨은 선생과 학생이 따로 있지 않다. 모두가 함께 배우는 실천공동체, 학습조직의 장이다. '장인대학'의 필요성을 역설하신 골목길 경제학자 모종린 교수님은 우리의 시작에 동기를 부여해주셨고, 마스터로 참여한 전통시장 도슨트이자 참기름소믈리에인 더로컬프로젝트 이희준 대표는 이후에 김맹찬 농부의 녹차로 진피녹차를 만들어 전국에 유통하게 되었다.

파트너로 참여한 아라리오제주 김지완 대표는 양웅걸 작가에게 나무 쟁반을 제작 주문하여 디앤디파트먼트제주 식당에서 사용했다. 장인끼리의 연결도 이어졌다. 현병묵 장인이 30여 년간 탐구해온 제주 전통 고가구인 살레장을 양웅걸 작가가 현대적으로 계승하게 된 것이다.

장인과 크리에이터의 연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3년 이내 자영업자들을 연구하여 로컬숍 연구잡지를 발간해 온 <브로드컬리>와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가 손을 맞잡고 <라이프타임워크> 시리즈를 발간했다. 로컬브랜딩스쿨의 현병묵 대표, 양웅걸 작가가 그 책의 주인공이었다.

2회째를 맞은 2020년에는 로컬브랜딩스쿨은 한층 더 발전했다. 마케터들의 모임을 운영하는 MushROOM 김영미 대표, 로컬브랜드의 성공을 돕는 김수진WORKS의 김수진 대표, 공간과 미디어,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하는 studio mmer의 차재 대표로 3인의 마스터가 함께 스쿨을 업그레이드했다.(관련 기사)

20여 명에 가까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파트너들이 강의와 리뷰 시간에 참여했다. 마지막 발표 때, 장인들이 "그동안 생각하지 못한 게 너무 많았다. 젊은 친구들답게 상큼하고 독특한 아이디어가 인상적이다", "처음에는 이야기를 들어도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젊은 친구들이 귤밭까지 찾아와 열심히 매달려서인지 '바꿀 때가 됐구나'라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고 발언하는 모습에서 이미 그들이 새로운 세상에 마음을 활짝 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트너로 참여한 아라리오 제주에서는 4명의 장인과 모두 협력하고 싶다고 했다. 책밭서점의 중고책들을 매입하고 강연을 열고, 아라리오 제주가 새롭게 만들 공간에 베케의 김봉찬 장인과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이미 디앤디파트먼트 제주에 입점해 있는 '100번 쌀집'의 초경공예는 새로운 시대에 맞게 리브랜딩될 것이다.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는 로컬브랜딩스쿨 제주를 매년 개최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도와서 장인들과 크리에이터들이 연결되고 협력하는 생태계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2020 로컬브랜딩스쿨에 참여한 네 분의 장인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출처 :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

1. 베케(VEKE)

김봉찬 장인은 식물학과 생태학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생태정원을 만드는 조경 전문가다. 제주 여미지 식물원, 포천 평강 식물원, 곤지암 화담숲 암석원, 서귀포 핀크스 비오토피아 생태공원, 아모레 성수 <성수가든>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VEKE정원은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정원을 만들어온 그가 온전히 자신이 생각한 생태정원을 구현한 곳이다. (관련 기사)

2. 100번 쌀집

김석환 장인은 1937년생이다. 퇴직 후 쌀집을 운영하며 어린시절 어깨너머로 배웠던 초경공예를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했다. 뉴질랜드가 원산지이자, 한국에서는 제주에서만 자라는 '신서란'을 주재료로 씨앗 담는 주머니인 씨앗망태를 비롯 다양한 공예품을 만든다.

'초경공예'의 맥을 이어갈 후학 양성의 바램도 있으나,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탓에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아쉽다고 한다. (관련 기사)

3. 책밭서점

김창삼 장인은 농사 짓는 농부이자 책밭서점 대표다. 1992년 35세의 나이로 단골 헌책방을 인수하며 오늘까지 운영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운영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내가 놓아버리면 사라지기 때문"에 한결같이 책방을 지킨다. (관련 기사)

4. 제주샘주

김숙희 장인은 제주 전통토속주 전문가다. 제주에 현존하는 전통주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오메기술과 오메기술을 증류해 만드는 고소리술이 주력상품. 700여년 전 증류법인 상압식 증류법을 고수한다.

 2011년부터 4년 연속 <대한민국 우리 술 품평회> 대상, 2014년과 2015년에는 벨리에 몽드셀렉션상 금상, 2015년에는 SWSC(San Francisco World Spirits Competition) 은상을 수상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