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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된 도시에서 치유받다, 태백 '무브노드'
김가현
20.06.26
태백 황지천 개울을 따라 길게 늘어선 하장성 마을. 버스가 요란하게 외지인을 실어 날라도 인기척이 없는 그 마을에 무브노드라는 공간이 문을 열었다. 일과 쉼 사이 균형이 필요한 디지털노마드와 깊은 상념에 빠져들고픈 여행자, 때론 호기심 많은 동네 학생들이 들르는 코워킹 스페이스다.
(출처 : 무브노드 홈페이지)
강원도 태백은 1970~80년대 대한민국 경제성장을 폭발적으로 이끌었던 석탄도시다. 기술이 발전되면서 그 자리를 석유·가스가 차지한 뒤, 석탄이 누렸던 영광은 금세 빛바랜 추억이 되었다.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에 따라 광산은 폐광되었고, 썰물 빠져나가듯 많은 인구가 일터를 잃고 태백을 떠났다. 이제 내년이면 마지막 남은 장성광업소가 문을 닫는다. 2025년 폐특법(폐광지역 개발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종료된다면, 점차 소멸될 가능성이 농후한 도시 태백. 그렇게 태백이라는 도시는 석탄 산업의 쇠락과 함께 내리막을 걷고 있었다.
석탄으로 만든 양초 굿즈
공간 무브노드는 활기를 잃은 도시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태백이 가진 단단한 로컬스토리가 디지털노마드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며, 무브노드는 그에 맞는 대안적인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더불어, 지역사회 청년들에게는 모여서 놀고 함께 일하는 네트워크의 거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무브노드의 김신애 대표는 이 공간을 시작으로 태백 특유 로컬 문화를 발굴하고 확산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태백에 창조적인 사람들이 모이고, 또 태백 안에서 인재가 길러진다면 태백은 곧 예술과 문화, 놀이를 기반으로 하는 문화도시로 변신할 것이라는 뜻이다.
기억을모으는미술관 ART-TEA는 작은 마을에 따뜻하게 예술을 우려낸다는 의미를 가진 작은 미술관 입니다. (출처 : ART-TEA)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한 상가 건물이 무브노드로 재탄생했다. 김 대표는 나무계단과 철문 등 원래부터 있었던 공간 하드웨어들을 그대로 살려두었다. 변화하는 것 사이에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 가치는 독보적이지 않을까.
무브노드가 문을 열자마자, 이 공간은 역사적인 스토리를 간직하면서도 트렌디한 인프라를 갖춘, ‘의외성의 매력’을 가진 곳이라며 어느새 태백 핫플레이스로 입소문이 퍼졌다.
(출처 : 무브노드 홈페이지)
무브노드를 방문한 손님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한다. ‘바깥은 태백인데, 들어오니 서울이네요’. 정확히 맞는 말이다. 무브노드 내부 모습은 서울에 힙하다는 여느 공간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애초에 디지털노마드를 타깃으로 기획된 공간이기에 디테일을 더욱 잘 살렸다. 여럿이 둘러앉아 프로젝트 회의를 할 수 있는 널찍한 테이블, 서서 일 할 수 있는 입식 책상과 산 능선을 품고 있는 창가, 프라이빗한 용도로 쓸 수 있는 소모임방도 있다. 물론 커피와 차는 무제한이다.
업무로 긴장된 머리를 잠시 식힐 수 있는 보드게임도 종류별로 갖춰놓았다. 외딴 동네에서 만나는 뜻밖의 인프라가 묘한 이질감을 풍기지만, 그래서 더욱 궁금해지는 곳이다.
(출처 : 무브노드 홈페이지)
그런데 왜 하필 태백이라는 도시에, 왜 하필 번화가도 아닌 하장성 마을에, 왜 하필 코워킹 스페이스를 열었을까?
김 대표는 어린 시절,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던 아이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이며 하루도 색연필을 놓지 않았다.
동네에서는 그림 좀 그리는 아이로 손에 꼽히는 인재였으나, 태백에는 더 이상 그림을 배울만한 곳이 없었다. 아이에게 주어진 유일한 통로는 천리안과 하이텔, 그림을 글로 배웠어요라는 우습고도 슬픈 상황은 아이에게 놓인 진짜 현실이었다.
겨울날 ‘책방 막장’과 연탄난로
배움을 향한 갈증은 점점 커졌고, 태백이라는 도시는 불현듯 장애물로 돌변했다. 그렇게 김 대표는 고향으로부터 튕겨져 나왔다. 하지만 서울살이 역시 녹록지 않았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과는 출발선이 확연하게 달랐다. 그렇게 서울에서는 늘 조연으로 밀려났다.
그녀가 태백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 역시 같은 맥락 선상에 있다. 문화혜택이 전혀 없었던 본인의 중·고등학생 시절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는 바뀔 때가 되지 않았나?
지역이 품고있는 문제 해결을 고민하는, 구문소 해커톤 '동네청년'
애정과 미움, 원망과 안쓰러움이 섞인 복잡한 심정으로 고향에 내려온 김신애 대표는 태백 도시재생사업의 기회를 잡아 공간 무브노드를 기획했다. 태백에 사는 친구들에게 지금 당장 대단하고 엄청난 것을 줄 순 없지만, 소소하고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이런저런 접점을 마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출처 : 무브노드 홈페이지)
최근 생겨나는 코워킹 스페이스들은 자기만의 Key 콘셉트를 갖고 있다. 무브노드의 콘셉트에 대해 묻자, 김신애 대표는 ‘고립과 치유’라고 답했다. 스스로의 경험이기도 하다. 서울살이에 지쳐 잠시 인생의 휴식기를 보내러 겸사겸사 돌아온 고향이지만, 고립된 도시 태백이 주는 치유의 힘을 발견했다.
더불어 서울에서는 늘 조연에 머물렀는데, 고향에 돌아와 활동을 시작하자 갑자기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어딜 가든 주인공 대접을 받았다. 이는 곧 자신감과 활기로 이어졌다. 이제야 비로소 살아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
서울에 있을 때보다 행복한 것은,
내가 주인공이라는 그 느낌 때문이에요.
태백에서는 누구나 주인공으로 살 수 있는 여건이 되니까요. 이제 비로소 진짜 살아있는 것 같아요.
❞
태백은 사실 김 대표에게도 이제 막 알아가면서 곁을 붙이는 도시이다. 마치 현실판 심-시티 게임을 하는 것처럼 동네 곳곳을 두고 여러 가지 상상을 해본다. 하얀 스케치북에 밑그림 그리는 모든 것은 현실이 되는 태백. 마을에 붓질을 하는 것처럼 만들어낸 공간이 벌써 세 곳이다.
코워킹스페이스 ‘무브노드’, 독립서점 겸 상회 ‘책방 막장’, 그리고 기억을 모으는 미술관 ‘Art-Tea’. 그 안에서는 어느새 반짝반짝 빛나는 작당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종이와 연필로 직접 동네를 그리고 기록하는 ‘도시화사’ 프로그램, 동네청소년들과 함께 태백의 문제를 포착하고 해결하는 ‘아이디어톤대회’, 두 다리로 걸으며 몸과 마음을 돌아보는 1박2일 걷기여행 ‘느린시간 걷는생각’ 등이다. 세 공간은 각각 아이디어를 탄생하고 이끌며 실현시키는 끈끈한 동네 인프라이다.
더불어 인근 중·고등학교 친구들이 향유할 수 있는 ‘힙한’ 문화를 제시하기도 한다. 태백 하장성 마을에는 중·고등학교가 무려 다섯 곳이나 있다. 4-500명의 청소년들이 생활하고 있는, 평균 연령이 꽤나 젊은(?) 동네이다. 무브노드를 주축으로 한 공간들은 청소년 친구들이 가진 다양한 욕구를 소화해내고 네트워크의 핵심이 되어가는 중이다.
(출처 : ART-TEA 홈페이지)
태백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하장성 마을을 들어가는 길,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없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며칠 동안 태백에서 느꼈던 ‘모든 가능성이 허락되는 그 생경함’을 지울 수 없었다. 살면서 이런 적이 있었나? 무슨 일을 하고자 할 때, 내 능력을 증명하지 않아도, 관련 경력을 제시하지 않아도 환영받는 그 무궁무진의 가능성이 정말 황홀했다.
태백이 자신의 고향이기에 더욱 진심과 에너지를 쏟을 수 있다는 김신애 대표. 동네에 새로운 공간이 몇 군데 생긴다고 도시 전체가 바뀌길 기대하진 않지만, 공간 안에서 키워낼 수 있는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다. 그녀가 만든 공간이 앞으로 태백이라는 도시와 어떤 시너지를 낼지 내일, 또 내일이 몹시 기대된다.
앞으로 ‘작은가게 오래가게’ 캠페인은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소상공인들과 로컬 크리에이터를 응원하기 위해 지역의 이야기를 전하는 김가현 작가의 글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그 시작은 강원 지역의 로컬 크리에이터들을 취재한 ‘로컬 큐레이터의 여행법’ 시리즈입니다. 이 콘텐츠는 서울시 청년교류공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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