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청년이 살고 싶은 지역이 되어간다는 것
전정환
21.12.08
2019년 7월 <중앙일보>는 전국 17개 시, 도의 만 15~64세 거주민 1만 명을 대상으로 ‘거주지와 상관없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살고 싶어하는 곳’에 대한 온라인 패널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에 따르면 전국 229개 시, 군, 구(세종시, 제주시, 서귀포시 포함) 가운데 1위는 서울시 강남구(18.3%)인 것으로 나타났다. 2위는 서귀포시(11.6%), 6위는 제주시(10.0%)였다. 가장 덜 매력적인 시, 도는 울산(1.2%)이었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싶다는 응답이 가장 많은 시, 도는 충남(67.3%)이었다. 울산은 2007년부터 10년간 1인당 국민소득 1위였던 곳이고, 충남은 정부 부처가 집중돼 인구 증가율이 높은 곳이다. 그런데도 '살고 싶어하는 도시'에서 가장 박한 점수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청년들이 살고 싶어하는 도시는 시대별로 변화한다. 국민 대부분이 가난했던 시절에는 일자리가 있기만 하면 좋은 도시였다. 기회의 땅 서울은 물론이고, 1970년대부터 집중적으로 조성된 산업도시들도 청년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울산, 거제, 창원과 같은 도시들에는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먼저 이주하고 그들과 결혼하는 사람들이 따라 이주해 자녀들을 낳고 키웠다. 그러나 이제 그 자녀들은 산업 도시의 획일적이고 척박한 문화를 힘들어하며 도시를 떠나고 있다.
찬란했던 산업 도시들은 MZ세대가 원하는 다양성, 취향, 삶의 질을 충족해주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중국 등 후발주자들의 맹렬한 추격으로 경쟁력까지 떨어지면서 도시가 급속히 쇠퇴하고 있다. 반면 산업 도시가 아니었던 제주도는 청년들이 가장 살아보고 싶어하는 도시가 됐다. 각박한 삶에 지친 서울 청년들만이 아니다. 다른 지방 청년들도 제주도에서 살아보기를 꿈꾼다. 이유가 뭘까?
제주에는 '괸당' 문화라는 것이 있다. 원래 '친족'을 뜻하는 이 말은 제주의 도민들이 서로를 챙기는 긍정적인 공동체 문화를 뜻했지만, 언제부터인가 '괸당'은 이주민을 배척하는 지역민의 끼리끼리 문화라며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난 몇 년 사이에 이러한 상황에 긍정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주민들이 지속적으로 내려오고 지역민들과 연결되고 교류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이 십여 년 이상 지속되면서 이제는 '괸당' 문화는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하고 있다.
지난달 24일부터 27일까지 제주 원도심 일대에서 진행된 '2021 제주 로컬 페스타'. 지역 혁신 주체들을 중심으로 로컬크리에이터와 지역민들이 로컬 브랜딩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다.
사실 수도권, 대도시가 아닌 이상 외지인의 유입과 교류가 많지 않은 지역은 그 지역만의 폐쇄적인 공동체 문화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 단일한 산업에 선택과 집중을 한 지역은 서로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서로 상부상조하며 협동할 수 있도록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에, 마을의 이장이나 대기업 관리자를 중심으로 수직적이고 획일적인 위계의 문화가 형성됐다.
유독 제주에 '괸당'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제주의 공동체 문화가 강했던 이유는, 제주가 과거에 이동이 자유롭지 않던 고립된 섬이었던 때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보면 다른 지방도시들에 비해 괸당 문화가 유독 문제시 되었던 것은, 인구가 지속적으로 빠져나가고 고령화되고 있는 다른 지방도시들과 달리 제주에는 청년 이주민들이 많이 유입되면서 다양성의 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자연스런 성장통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988년 들국화 최성원이 '제주도의 푸른밤'을 발표한 때를 시작으로 제주도는 서울에 대한 대안적 라이프스타일을 꿈꾸는 이들의 이주의 로망을 일으켰다. 이러한 로망에 이어서 2000년대 들어 저가항공의 등장으로 제주는 전국 각지에서 접근성이 좋은 지역이 되면서, 다양한 이주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2004년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선발대 20여명이 애월 유수암 펜션을 빌려서 정착한 것을 시작으로 2006년 오등동에 다음커뮤니케이션 글로벌미디어센터(GMC)를 짓고 200여명이 근무하게 되었고, 2007년에는 서귀포 출신으로 서울로 가서 <시사저널> 편집장까지 올랐던 서명숙이 제주로 리턴하여 '제주올레'를 설립하고 제주 올레길을 만들었다. 2010년 가수 이효리가 이주하면서 문화이민 붐이 크게 일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주민이 많아지자 지역에는 다양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초기에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는 자리잡지 못한 상태였다. 2015년에 필자가 다음카카오 소속으로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에 파견되어 첫 센터장을 맡았을 때만 해도, 지역민과 이주민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지역 사회의 큰 문제였다. 센터장을 세번 연임하여 7년째가 된 지금까지 필자는 제주의 변화를 현장에서 참여 관찰할 수 있었다. 이제 제주도에는 지역민과 이주민이 함께 어우러지고 함께 연결되어 새로운 것을 만드는 청년 문화가 태동했다 . 다양성이 존중되고 창의성이 촉발되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제주에서 10대까지 보내고 서울로 떠났던 20대 청년들이 자신의 고향 제주가 매력적인 곳이라는 것을 자각하며 되돌아오는 사례도 늘고 있다.
다른 지방에서는 아직 흔하지 않은 일이다. 경향신문은 2021년 10월 <절반의 한국> 특집 기사를 시리즈로 냈다. 이 기사에서는 전국 인구의 절반을 넘어선 수도권과 다른 절반인 비수도권 지역 사이에 어떤 불균형 이슈가 발생하고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특히 '지방 소녀들은 어디로, 우리가 고향을 떠난 이유'라는 기사를 통해, 2008년 강릉 A여고 같은 반을 다니고 졸업한 동창생 36명과 2014년 B여고 같은 반을 다니고 졸업한 동창생 29명을 추적 인터뷰했다. 이들 중 현재 서울, 경기 등 수도권에 살고 있는 이들은 절반이 넘었다. 이들이 수도권으로 간 이유는 성장, 미래, 기회를 위해서였다.
청년이 일하고 살기 좋은 지역을 만들려 할 때 청년 문화가 먼저 자리잡아야 할까, 일자리가 먼저 충분해야 할까. 시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사실 제주도는 아직 좋은 일자리가 풍부한 곳은 아니다. 그럼에도 왜 청년들이 제주로 이주하거나 리턴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제주에 다양성이 높아지고 선진국 한국의 청년이 원하는 문화가 가장 성공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의 색을 연구하고 사업화하는 컬러랩제주 김명은 대표가 제주 원도심의 기념품샵 더 아일랜더 임상규 대표와 오각집에서 열린 로컬페스타 전시에서 협력을 논의하고 있다.(2021.12.27
2011년 미국 포틀랜드에서 발간되기 시작한 '킨포크(Kinfolk)’ 매거진은 킨포크 라이프스타일을 전세계에 유행시켰다. 이 매거진은 '가족, 친구 등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자연친화적이고 건강한 생활양식을 지향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하는데, 바로 킨포크의 사전적 정의가 괸당의 어원인 '친족'이다. 다양성이 존중되면서도 친밀감이 있고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선진국형 지역 공동체 문화가 바로 킨포크 라이프스타일인 것인데, 바로 제주의 '괸당' 문화가 진화하면서 이러한 지역 문화로 발전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지역의 미식 문화의 발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과거에 제주의 음식은 도민들이 먹는 음식과 관광객들이 먹는 음식이 구분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식을 즐기는 이주민들이 늘어나고 고급 요리를 할 수 있는 쉐프들도 이주하면서 점차 지역의 전통적인 요리 방식이 새로운 요리 문화와 접목되어 점점 더 세련된 미식 문화, 요리 문화가 성장하고 있다.
미식문화 발달을 가늠할 수 있는 것으로는 커피, 디저트와 와인을 들 수 있다. 2006년 다음커뮤니케이션이 오등동에 사옥을 만들고 200여명이 근무하게 되었을 때만 해도 제주에서 에스프레소 기반의 커피를 마실 만한 곳이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직원 복지를 위해서 사옥 내에 일리(illy) 카페를 만들었는데 외부인도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했기 때문에 좋은 커피를 즐기는 지역민들에게도 금세 명소가 되었다. 15년이 지난 현재 제주는 도시뿐 아니라 시골 지역에서도 질 좋은 커피와 디저트를 청년과 노인 모두가 즐기고 있는 특별한 지역이 됐다.
초기에 정착한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직원들은 지역의 맛집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찾아가며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다. 어쩌다 한번 오는 관광객들이 찾는 메뉴와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찾는 메뉴는 다를 수밖에 없다. 지역민들이 지역특산 메뉴만 매일 먹고 살지는 않기 때문이다. 관광객은 제주에 여행와서 흑돼지, 회를 찾지만 제주도민은 그 외에도 이탈리아, 인도, 베트남, 스페인 등 다국적인 특별한 음식들을 먹기를 원한다. 처음에는 서울의 음식점들에 비해 다소 맛이 덜했지만 이제는 지역민의 미식 문화가 발달하고 뛰어난 셰프들이 등장하고 지역의 식재료를 활용하는 방법이 개발되면서 귀한 식재료와 분위기를 제공하는 파인다이닝이 생겨나고 있다.
과거 모든 지역의 원도심은 다양한 사람들이 교류하는 핵심 요충지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모두 원도심이 쇠퇴하고 신도심이 발달하는 과정을 겪었다. 서울이 70~80년대에 강남을 개발하고 활성화하기 위해서 강북에 있던 핵심 기능들인 행정, 학교 등의 기능을 모두 강남으로 이전했던 것을 서울을 닮고 싶었던 모든 지방도시들이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지방도시의 신도심은 서로 비슷비슷하게 생겼다.
제주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선도하는 지역으로 발전해가면서 제주의 원도심은 다양성이 결합되고 창의성이 발현되고 향유되는 크리에이터들의 허브로 거듭나고 있다. 제주에서 청년들이 가장 많이 찾던 탑동은 2010년대에 들어서 급격히 쇠퇴했지만 아라리오가 이곳에 갤러리를 만들고 지역의 건물들을 매입하여 맥파이 브루어리, ABC 베이커리 등을 만들고 롱라이프디자인을 하는 디앤디파트먼트 제주를 만들면서 라이프스타일 산업을 선도하는 로컬크리에이터의 거리로 거듭나고 있다.
제주 원도심에는 올해만 해도 흥미로운 공간 여러 곳이 생겼다. 칠성로에는 일도가공이라는 식당이 생겨서 제주의 원물을 이용한 창의적인 요리를 서비스하고 있고, 오각집이라는 공간이 생겨서 라이브 공연이 열리고 있다. 또한 탑동 부둣가의 횟집 거리의 빈 건물에는 부산 영도의 대표적인 로컬크리에이터 RTBP가 제주 탑동 끄띠를 오픈했다. 또한 감동공간연구소는 지역의 명소였던 스타즈 로베로 호텔을 텐저린멘션이라는 부띠끄 호텔로 재탄생시켰다.
제주시 탑동에 만들어진 와인 바 '끄띠'와 벽화
2021년 11월 27일 오각집에서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가 주최하는 로컬페스타가 열렸다. 이곳에는 제주 각지에서 활동하는 40여 로컬크리에이터들이 모여서 서로를 소개하고 네트워킹하며 함께 협력을 논의하는 시간이었다. 페스타가 끝난 후에는 뮤지션 디디가 라이브공연을 했다. 골목을 지나가는 아이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문밖에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제주 도민인 이 아이는 공연을 들으며 어떤 미래를 상상하고 있을까?
제주시 원도심 '오각집'에서 열린 로컬페스타에서 로컬크리에이터들이 서로의 사업을 공유하고 네트워킹을 했고, 뮤지션 디디의 공연이 있었다.
2010년에는 서울에서, 특히 홍대 인근해서 활동하던 창의적 인재들이 제주로 많이 이주했다. 이제 10여년이 지나서 다양성이 높아지고 결합하여 창의성이 발현되는 지역인 제주에서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가는 이들은 앞으로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이후에 또다른 라이프스타일 도시로 떠오르고 있는 강릉과 통영으로 진출할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일자리는 많지만 획일적인 문화 때문에 청년들이 외면하고 있는 도시인 울산, 거제, 창원에까지 진출해서 그 지역을 더욱 재미있고 살만 한 곳으로 만들 것이다. 다시 말해 지역의 커피 맛이 좋아지고,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지역 식재료를 이용한 창의적 요리들이 늘어나고, 이를 즐겨 먹는 사람들과 만드는 사람들이 일정 인구 비율을 넘어서는 순간, 공연도 전시도, 창의적인 기술 스타트업들도 그곳에 있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한강의 기적으로 만들어낸 수도권 집중이라는 강력한 관성을 되돌려서 전국 각 지역을 청년들이 일하고 살만 한 매력적인 지역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운동장을 넓게 쓰면 서울 청년들의 헬조선도, 지방 청년들의 무력감도 그 마법의 저주가 풀려갈 것이다. 물론 관성을 바꾸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십년, 이십년, 삼십년이 걸릴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오지 않을 미래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길게 보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청년들에게 지금 미래를 열 열쇠를 가진 기회의 땅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제주를 시작으로 전국 각 지방은 자신의 일과 삶을 추구하며 함께 성장해갈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전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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