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전정환 칼럼] 도시는 어떻게 창조성과 생명력을 얻는가
전정환
22.02.24
"장소애는 어떻게 생기나요?" 대학과 연구소가 많은 도시인 대전광역시에서 창업가들의 커뮤니티를 만들고 있는 사람이 물었다. 나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당혹스러웠다. 7년간 제주의 창업생태계 조성자 역할을 하면서 지켜본 창업가들은 하나같이 지역에 대한 애정이 컸기 때문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에게 "왜 제주에서 스타트업을 하나요?"라고 물어보곤 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다들 달랐지만 설득력 있는 이유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제주의 문제를 비즈니스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고, 어떤 이들은 그냥 제주의 매력에 이끌려 이곳에서 일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이처럼 저마다의 이유는 달랐지만, 그 기저에는 지역에 대한 애정이 깔려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주의 창업가들을 오랜 기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다른 도시의 창업가들도 그 지역에 대한 애정을 당연히 가지고 있을 거라 여겼던 것 같다.
나 또한 내가 자라난 강남 역삼동에 대해 특별히 장소애를 느끼지 못하며 살았다. 어린시절에 애착을 느꼈던 장소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급변해버리자, 이때 느꼈던 큰 상실감의 기억만 남게 됐다.
어릴 적 그 동네는 밭이 있는 비포장 골목길이었다. 나는 공터에서 동네 친구들과 야구를 하며 뛰놀곤 했다. 동네에는 20미터가 넘는 높은 나무들이 곳곳에 있었는데, 그 나무 위로 매가 원을 그리며 날았다. 하늘의 매를 올려다보며 걷다 보면 어느덧 신발엔 진흙이 잔뜩 묻어 있곤 했고, 가족들은 대문을 들어설 때마다 흙을 툭툭 털어내야만 했다.
이제 그 풍경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내 기억 속에만 있다. 어느 순간 진흙땅 대신 아스팔트가, 큰 나무 대신 더 높은 빌딩숲이 빼곡하다. 밭이 있던 곳에는 기술창업가들의 거점인 팁스타운(TIPS town)이 생겼다. 창업가들이 꿈을 일구는 그 건물에 일 때문에 가끔 찾아가지만, 그곳은 더이상 나의 추억의 동네가 아니다.
이처럼 도시는 시간의 흐름 속에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을 먹고 살아가는 유기체와 같다. 역삼동은 나의 애착을 매정하게 내쳤지만, 지금 그 동네는 창업가로서 인생의 가장 몰입도 높은 시기를 보내고 있을 청년들에게 그들이 쏟은 열정의 아련함이 담긴 추억의 장소로 남게 될 것이다. 도시 속 어느 장소에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청년기를 보내는 다양한 이들의 기억이 겹겹이 쌓여 가고 있다. 누군가의 흔적이 사라진 곳에 누군가의 기억이 쌓이고 있다.
살아있는 도시의 특징은 어떤 이의 기억이 독점하여 지배할 수 없는 곳이라는 데 있다. 이전 세대의 기억과 새로운 세대의 기억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균형을 이루고 끊임없이 융합하는 곳이 좋은 도시다. 그곳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의 저마다의 경험과 기억이 중층으로 쌓여가며 상호작용을 하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각각의 방식으로 한 장소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며 부대끼며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그 장소에서는 서로 다른 세대의 이질적인 기억들이 충돌하며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이 동네를 내 어릴 적 모습 그대로 돌려놓아라!" 제주 원도심에서 10대를 보내고 유학을 가서 오랜 외지 생활을 한 후 40대 후반에 돌아와 문화 운동을 해온 이의 절규다. 이제 50대 후반이 된 그에게 어린시절 고향의 소중한 추억들은 원도심의 골목길 사이사이에 붙박여 있다. 그는 자신의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산지천이 복개되고, 재개발로 광장이 조성되자 자신이 기억하는 골목길의 흔적이 사라졌다며 분개했다.
복개된 산지천과 탐라문화광장
그보다 몇 년 전, 탑동의 전성기에 청년기를 보낸 이들은 동네가 쇠퇴하여 문 닫은 탑동시네마 건물을 아라리오 갤러리가 매입해 미술관으로 만든 것에 분개하기도 했다. 단지 그들의 추억이 담긴 건물을 붉은색으로 칠했다는 이유만으로 분노는 증폭된다. 자신들의 옛 추억을 덮어버린 붉은색 페인트를 질타하며, 정작 그 미술관에 들어가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평생 아라리오 제주가 탑동시네마 뮤지엄 내부에 일부러 남겨놓은 제주 최초의 KFC 매장의 타일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다.
아라리오 뮤지엄 탑동시네마 1층 벽에 남겨진 KFC 타일
산지천을 어린 시절 그대로 돌려놓으라는 제주도민도 있지만, 도민들이 산지천에 대해 좋은 기억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 재개발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는 집창촌도 있었다. 당시에는 해가 질 때면 호객하는 중년 여성과 노숙자들이 한적한 거리에 나타나 대다수의 청년들은 그곳을 지나가는 것을 무서워했다. 재개발 이후에도 오랜 기간 많은 이들이 외면하고 활기를 찾지 못한 이유기도 하다.
산지천의 가능성을 먼저 발견한 것은 지역 청년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주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시선으로 제주도민들이 이곳에서 경험한 기억과 유산을 수집하고 자신들의 경험과 기억을 새롭게 만들어갔다. 길 건너편 동문시장, 관덕정과 같이 전통을 간직한 곳과 재개발된 지역 사이의 연결성이 생겨난 순간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지역 청년들에게도 이곳은 과거, 현재, 미래가 다시 연결되는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곳으로 거듭나고 있다.
사람은 태어나서 청년기를 지나 나이가 들면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도시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계속 생기는 한 끊임없이 생명력을 유지한다. 살아있는 도시에서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청년 문화가 끊임없이 생성되고 융합되고 재창조된다. 청년기에 도시에서 경험한 기억들은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거꾸로 그 도시에도 영향을 되돌려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청년이 나이가 들어 중장년, 노인이 되고 새로운 청년들이 나타나면 도시에는 다양한 시대를 살아간 청년들의 기억이 중층으로 겹겹이 쌓인다. 그리고 그것들이 연결되고 충돌하고 융합된다. 결국, 도시는 생명력을 가진 창조적인 장소가 된다.
반대로, 오직 죽어가는 도시만이 단 하나의 기억이 지배한다. 지방에서 청년기를 보낸 이들이 서울로 대부분 떠나고 지방도시와의 연결이 끊어지면 청년의 기억은 파괴되고 도시의 생명력, 창조력 또한 파괴된다. 새로운 청년들의 기억이 생성되지 않으면, 지역에 남아 노인이 되어 가는 한때 청년이었던 이들이 그 도시에 대한 청년문화의 기억을 독점하게 된다. 그런 도시에서 청년들은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자신들의 가능성을 펼칠 수 없는 ‘꼰대’들의 도시로 여겨진다. 그곳에서는 현재의 청년들이 장소애를 느끼기도, 새로움을 창조하기도 어려운 침체의 악순환에 빠진다. 그러니 그 청년들은 자신이 자라온 도시를 떠나서 차라리 낯선 서울에서 새로운 추억 쌓기를 선택한다.
지방도시의 위기는 청년들의 문화와 장소애의 위기다. 대구의 경우 한때 '김광석 거리'로 유명했고 길거리 밴드도 있던 청년 문화가 있었다. 전국으로 퍼져나간 치맥 문화의 탄생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청년들도 이제 중년이 되어 버렸고 더이상 청년문화가 아니게 되었다. 그들은 한때 자신들이 청년이었을 때 영화로웠던 도시를 기억하지만, 더이상 스스로 창조하지 못한다.
세대 간의 연결뿐 아니라 영역 간의 융합도 중요하다. 청년들이 많아도 다양성이 부족하고 경계를 넘는 연결과 상상력이 부족하면 장소애가 생기지 못한다. 대전시 대덕의 KAIST 학생들은 캠퍼스 밖 골목길에서 추억을 쌓지 못하고 있다. 매력적인 골목길에서 창의성이 융합되는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자신의 20대를 보낸 지역에 대한 애착이 형성되지 못한 채 졸업하면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가버린다.
제주 '해녀의부엌'에서는 제주해녀들과 함께 공연과 레스토랑을 결합한 다이닝을 운영하고 있다.
사실 KAIST와 대덕연구단지가 있는 대전에는 도시의 창의성을 위한 뛰어난 인재들의 시도가 계속 생겨나고 있다. 충남대학교 출신의 한복남 박세상 대표는 충남대 재학시절 충남대와 KAIST 사이의 궁동에서 처음 지역 커뮤니티 기반 창업을 했었다. 그곳에서의 사업은 실패했지만, 이후 고향인 전주로 돌아가 지역 문화를 활용해 성공한 대표적 사업가가 되었다. 로컬크리에이터의 커뮤니티 리더인 어반플레이 홍주석 대표도 KAIST 출신이고 첫 프로젝트가 대전 원도심의 성심당 프로젝트였다. 이후 대전에서의 지속적인 활동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연남동, 제주, 영도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지역은 이런 이들의 활동이 도시를 창조적으로 만드는 데 많은 기여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도시는 이들을 존중하고 지지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대전에 부족한 다양한 영역 간의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창의적 융합력을 키우고 도시의 상상력을 높여야 한다.
도시의 '공간'은 사람의 기억이 쌓여야 비로소 '장소'가 된다. 그러니 '장소애'와 '장소'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사랑을 받고 기억이 머물지 못하면 결코 장소가 될 수 없다. 사람의 시간은 유한하지만 도시의 생명력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가며 연속하며, 살아있는 도시는 다양성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연결되고, 융합된다.
좋은 도시는 다양성이 유지되고 그들 간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곳이다. 기성세대들과 청년세대들이 서로의 기억에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고 새로운 것을 즐겁게 함께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하는 창조 자본, 사회적 자본이 풍부한 도시, 그곳이 청년들이 살고 싶은 도시다. 이러한 청년들이 많이 모여들면 그 지역의 창조 자본, 사회적 자본은 더욱 커져가는 선순환의 되먹임이 일어난다. 결국, 그 도시는 다양한 시대를 살아간 청년들의 기억들이 중층으로 쌓이고 그것들이 역동적으로 결합하는 창조도시가 되어갈 것이다.
전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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