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전정환 칼럼] 지역의 스토리텔러가 변화관리자가 된다
전정환
22.07.28
지역의 변화는 장기간에 걸쳐 많은 이들의 참여를 통해 일어난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도록 만들려면 그들이 함께 공감하는 스토리가 필요하다. 혼자 생각하는 스토리는 공상에 머물지만, 여럿이 공감하는 스토리는 비전이 되고 변화의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국가주의적 지역개발 시대에는 국가가 강력한 스토리를 만들어 국민에게 보급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라고 전국민, 모든 지역에서 믿고 행동한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이 대표적이다. 처음엔 몇몇 사람들의 희망 어린 상상의 스토리로 시작했겠지만 결국 대한민국의 성공 신화라는 스토리로 역사에 남았다. 이때는 서울과 지방이 그 시대의 방식으로 동시에 발전했다. 한강의 기적과 새마을운동의 신화가 서로 수십 년에 걸쳐 호응하며 장기간의 변화를 만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국가주의 개발 스토리는 수명을 다한 지 오래다. 수도권과 지방이 함께 동반 성장했던 신화는 깨졌다. 절반의 한국 수도권이 나머지 절반의 한국의 모든 자원을 계속 빨아들이며, 지방은 인구 감소, 고령화의 길로 급속히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스토리텔링이 요구되는 시대다.
모든 지역에는 저마다의 스토리가 있다. 동네의 스토리는 이야기꾼에 의해 사람과 사람을 거쳐 전해지며, 이야기는 저마다의 경험과 생각이 덧붙여져 계속 재생산된다. 이야기가 주로 생성되고 전파되는 장소는 마을이었고, 원도심은 여러 마을들의 이야기가 모이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지역과 지역 사이에서 교류의 중심이자 이야기가 전해지고, 이어지고, 생겨났다. 오랫동안 한 지역에서 살아가는 이들과 외지에서 찾아온 이들의 낯선 이들의 이야기가 만나서 융합되고 사람들의 경험이 더해져 또다른 스토리로 이어져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동네의 이야기꾼이 멸종되어갔다. 한강의 기적과 새마을 운동의 국가 스토리에 전국민이 빠져서 수십년을 지내온 여파인 것.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먼저 이야기꾼과 그 이야기를 공유하는 공동체가 사라져갔으며, 동네의 이야기들은 점점 자라나지도 전해지지도 않게 되었다. 지방 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 서울과 꼭 닮은 신도심에 아파트 단지들이 생기고 원도심이 쇠퇴하면서 동네의 차별화된 정체성이 옅어지고 이야기꾼들이 점차 사라져갔다. 도심 밖 마을들은 점차 고령화되고 인구가 감소하면서, 동네의 역사를 전하고 미래를 함께 상상하는 공동체 역시 쇠락해갔다.
발터 벤야민은 그의 에세이 <이야기꾼 The Storyteller, 1936>에서 이야기꾼의 원천에는 두 그룹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먼 곳으로부터 와서 이야기를 전하는 여행자다. 이 이야기꾼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선원에게서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또다른 하나는 고향에서 생업을 하면서 자기 고향의 이야기와 전설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한곳에 정착해서 땅을 경작하는 농부에게서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근대화가 되면서 이러한 역할을 하던 이야기꾼들이 사라져갔다. 벤야민은 현대에는 경험이 전해지고 이어지는 이야기 대신에, 정보가 그 자리를 대체해가고 있다고 했다.
한국도 근대화의 시기에 이야기꾼들이 사라져가는 과정을 겪었다. 하지만, 1930년대 서구와 2020년대의 한국이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다. 온라인에 수많은 이야기들이 쓰여지고 지역의 경계를 넘어서 전해지고 있다. 단, 이 이야기들 대부분이 동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동네의 이야기는 어떻게 다시 생겨날 수 있을까?
근래의 로컬크리에이터들의 등장은 동네의 이야기꾼의 귀환이자 재탄생이다. 한국에서 지난 몇 년 사이에 대표적 현상 중 하나는 지역의 고유의 유무형의 자원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비즈니스를 하는 로컬크리에이터 현상이다. 이들은 지역의 콘텐츠와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성장하며 다시 콘텐츠와 커뮤니티를 키워낸다. 새로운 시대에 맞춰 변모한 이들은 동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융합적이고 창의적인 이야기들을 생성하고 전한다. 이들 이야기꾼들은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볼 수 있다.
첫째는, 전국 곳곳에서 매력적인 동네를 찾고 이야기를 발굴해서 전국에 알리는 이야기꾼이다. '도시에도 OS가 있다'를 슬로건으로 2013년 창업한 어반플레이(urbanplay, 홍주석 대표)가 그 대표주자다. 대전 성심당의 스토리를 콘텐츠화하고 전시를 기획한 것을 시작으로 서울의 연남동, 제주의 송당리, 강원 강릉 등 로컬의 콘텐츠를 발굴하고 전시하면서 동네의 스토리텔러로 자리매김했다. '우리가 태어난 나라를 여행하지만,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도시를 탐험합니다'라는 슬로건으로 종로, 군산, 통영 등 로컬의 장소, 사람, 경험을 매거진으로 담는 소도시(so.dosi) 김가은 대표, <로컬 꽃이 피었습니다>를 쓴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윤찬영 센터장, 로컬 미디어 비로컬의 김혁주 대표 또한 대표적으로 매력적인 동네를 찾아다니고 알리는 스토리텔러로 볼 수 있다.
둘째는, 한 지역에 살면서 시대를 넘나들며 오래된 이야기와 새로운 이야기를 버무려 엮어내는 이야기꾼이다. 대표 사례로 2014년 제주 로컬매거진 <iiin>을 창간한 콘텐츠그룹재주상회를 들 수 있다. 재주상회 고선영 대표는 원래는 여행 작가였다가 정착민이 되었다. 소도시를 여행하기 좋아해서 2010년에 27개의 소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소도시 여행의 로망>을 출간했다. 이후 서귀포 사계리에 정착해서 제주의 스토리텔러가 되었다. 재주상회는 지역민과 이주민, 여행자의 경계에서 지역의 이야기를 융합하여 전한다. 홍대 앞 동네의 이야기를 전하는 <스트리트 H>를 발간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203 장성환 대표, <다시부산>을 발행하는 다시부산 박나리 대표가 이러한 동네 이야기꾼이다.
지역의 새로운 이야기꾼들인 로컬크리에이터들은 지역의 변화 관리자이기도 하다. 지역의 변화상에 맞추어 지역의 오래된 이야기들도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해 들려주고, 그 지역에 체류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또, 새롭게 이주한 이들의 이야기들은 지역의 이야기에 덧붙여 써내려간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지역의 스테이나 독립서점과 같은 장소 기반 사업을 영위하면서, 동네에서 커뮤니티 학습 프로그램과, 여행객들을 위한 동네 투어 프로그램도 운영하면서 많은 지역민과 여행객들에게 이야기를 전한다.
충남 공주의 퍼즐랩 권오상 대표는 원래 경기관광공사에서 외국인들을 위한 지역 여행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한 경력이 있다. 그는 처가가 있는 공주에 왔다가 매력적인 한옥에 반해서 덜컥 매입하고 한옥스테이 봉황재를 운영하게 되었다. 봉황재에 머무르는 사람들에게 그는 공주 원도심 동네를 투어하고 소개해주어 그들이 동네의 매력에 빠지게 만들었다. 동업자인 퍼즐랩 이병성 이사도 그런 계기로 이주하고 합류했다.
그 동네에 오래 살아왔던 분들 하나하나와 흔적들이 스토리가 되었다. 공주는 현대인에게 부족한 것들도 많았다. 그가 이런 것들이 생겨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많은 이들에게 하자, 신기하게도 베이커리, 독립서점, 편집샵, 와인집 등이 차례로 생겨났다. 동네에 다양한 커뮤니티 모임들도 만들어졌다. 2021년에는 행전안정부의 청년마을 만들기 사업을 통해 많은 청년들이 공주에 체류하게 되었는데, 퍼즐랩이 전한 공주 원도심의 매력에 빠져든 이들이 하나둘씩 공주에 자리잡고 매력적인 장소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공주시 퍼즐랩 권오상 대표가 공주의 원도심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대전 원도심의 독립서점 다다르다는 김준태와 박은영 부부가 운영하고 있다. 김준태는 대전이 고향이고 박은영은 서울에서 왔다. 이들은 동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다. 북토크와 커뮤니티 모임을 꾸준히 하면서 지역에서 지식과 경험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다다르다는 두시간 정도에 달하는 원도심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들은 동네의 베이커리, 문구점, 카페, 식당 등 하나하나 주인과 그들의 스토리를 알고 있다. 투어 프로그램 참가자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동네를 걷고 카페에서 음료와 디저트를 먹고 문구점에 문구를 사면서 주인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이렇게 다다르다는 동네의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지며 만들어가는 스토리들을 수집하고 엮어서 전달하는 동네의 이야기꾼이다.
대전 원도심 서점 다다르다에서 열리는 북토크
속초의 소호259 호스텔을 운영하는 트리밸 공동대표인 이상혁, 이승아는 남매다. 그들은 2012년 겨울에 함께 유럽에 배낭여행을 다녀왔다가 게스트하우스 문화에 반해서 전국 각지를 탐색 끝에 속초의 시외버스터미널 바로 뒤 골목에 게스트하우스를 만들었다. 7년이 지난 지금, 그 골목길은 속초를 오는 여행자들의 거점으로 느슨한 커뮤니티를 이루며 지역과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그곳에 머문 여행자들은 속초의 골목길 매력에 빠져 재능기부로 벽화를 그리거나 지역에 이주하여 오랜 역사의 고구마쌀집을 새롭게 재탄생한 고구마쌀롱의 운영자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소호259는 여행자들과 골목을 연결하는 마을 컨시어지로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써내려가면서, 그 동네의 이야기들을 풍성하게 생성하고 전달해내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속초의 소호259와 골목길
전국 각지의 로컬크리에이터들은 이렇게 동네의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가는 원천이 되어가고 있다. 목포의 공장공장이 2018년 시작한 '괜찮아마을'은 지친 청년들이 목포에 머물며 인생의 다음을 준비해보는 프로그램이다. 이것을 계기로 행정안전부는 '청년마을 만들기 지원 사업'을 만들어서 전국 각지 동네에 청년들이 체류하며 지역을 알아가며 살아보는 프로그램을 활성화하고 있다. 충남 서천 한산면의 삶기술학교, 강원 강릉의 '강원살자' 등이다. 이 사업을 통해 지역에 정착하거나 이주한 청년들도 있지만, 더 중요한 성과는 이 사업을 하는 지역의 로컬크리에이터들이 동네의 이야기꾼이자 변화관리자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입을 통해 동네의 오래된 이야기들이 새로운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체류자 또는 이주자들의 새로운 경험들이 동네의 이야기로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고대뿐 아니라 현대 사회에도 신화가 인간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고 말한다. 현대의 신화는 박제된 죽은 신화가 아니라 끊임없이 쓰여지는 살아있는 신화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들의 이야기, 신화를 가지고 살아간다. 지방에서 태어나 서울로 가서 성공을 일구고 강남에 자리잡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그 세대의 신화다. 제주에서 감귤 나무를 키워서 자녀를 서울에 보내서 성공시킨 부모의 이야기도 신화다. 이제 새로운 세대들은 또 어떤 신화를 써 내려갈까.
제주는 18,000개의 신의 이야기가 있는 신화의 섬이라 한다. 이렇게 많은 신화들 중에 현대에 재해석되고 생명력을 가지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많지 않다. 어쩌면 그 수많은 신화들이 탄생했던 비결은 18,000개가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제주에서는 누구나 신화를 만들어낼 수 있고 이야기하고 전파하고 있었다는 가치가 본질이 아닐까.
지역의 동네마다 이야기꾼이 있고 그들이 그 지역의 신화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그 이야기를 경험하고 또다른 이야기를 써 내려갈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역은 다시 살아있는 동네가 되어간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고 있는 지역의 미래다.
전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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